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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양득] 기사회생(起死回生)

기사승인 2022.09.23  14: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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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양득 / 에이펙 아카데미 & 어학원장

1986년 육사 47기 입학의 마지막 관문인 학력고사를 몇 주 남겨두고 같은 반 친구들은 '황소대장님' 하면서 농담 반 부러움 반으로 본인의 심기를 들뜨게 했다.

결국, 학력고사 점수가 낮아 낙방하고 인근의 법학과에 입학했다. 주변에서는 고시 공부가 있으니 불합격의 실망을 빨리 털고 일어나 법학도로서 잘 준비하라는 격려도 많이 해 주었다.

웬걸 입학 전 과제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읽고 요약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숙제는 그때까지 경험해보질 못한 심한 압박이었다. 과제 제출도 부담스럽고 일반대학 진학도 못마땅한 터라 입학 후 2주 즈음 휴학을 하고 다시 육사 도전을 위한 반수의 길을 택했다.

48기 입시부터 육사 입학시험 제도가 바뀌었다. 먼저 선발 고사를 보고 서류전형에 체력장, 신체검사, 면접으로 최종 합격을 판정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공부를 하는 것이 정말 편하고 좋았다.

독학을 선호하게 된 것은 사연이 있다. 78년 부산으로 전학을 간 이후 초등 6학년 때부터 아침 식사 후 꼭 화장실을 가야 마음이 편해지는 증상이 생겼다. 중·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정로환 TV 광고 선전의 영향으로 어림짐작 진단인 과민성 대장 증상은 더 심해졌다.

급기야 중학교 수학여행에서 겪은 남모를 고생, 너무 기쁜 나머지 출발 첫날 볼일을 제대로 못 보고 수학여행 버스를 탔다. 고속도로 휴게소도 아닌 논밭에서 볼일을 해결하라고…인적 드문 저 먼 들판까지 뛰어가고 다시 나만 두고 차가 떠날까 봐 내달려 온 마음고생으로 두 번 다시 수학여행 안 간다고 다짐을 했다.

그래서 정말 고등학교 때는 수학여행을 안 갔다. 다들 왜 안가냐고 야단법석… 수학여행 기간에 교실에서 차분히 영어 교과서를 많이 읽은 덕에 그달 영어 성적이 올라 그때부터 종합성적이 많이 향상됐다.

15년 이상 학원을 하면서 늘 중·고등 학생들에게 수학여행을 안 가고 공부하면 서울대 간다고 말을 해도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을 본 적은 없다. 내 아들딸도 마찬가지였다.

1차 선발 고사의 3배수 모집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위해 서울 태릉, 육사 병원에서 실시하는 신체검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맥박이 도무지 100회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담당 군의관이 다른 응시자들을 다 측정하고 난 뒤 본인만 따로 다시 한번 맥을 짚었다. “안 되겠다”라는 말에 하늘이 노랬다.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군의관이 신체검사 기록지에 不자를 쓰려던 찰나에 오른손으로 결과 검사지에 손을 대고 못 쓰게 막았다. 47기 신체검사 경험이 있어 직감적으로 그런 반응이 나왔던 것 같다.

달리기는 12초대에 주파를 하고 축구를 아주 많이 잘해 47기 시험에도 축구선수 생도 예정이었으나 학력고사에서 떨어졌습니다. 또 덧붙여서 재수생이라서 그런지 오늘따라 너무 긴장된다는 하소연과 함께 "한 번만 봐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던 것 같다.

그 군의관은 나즈막이 "알겠다"면서 혹 육사에 입교하면 나중에 자신을(당시 육사 내과과장) 한번 찾아오라고 말을 했다.

필자는 “예”라고 큰 소리로 말했으나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기사회생의 여세를 몰아 그다음 날 면접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면접관에게 “제게 병이 있는데 양의사나 한의사나 그리고 약사들도 이구동성으로 육사에만 들어가면 낫는 병이라고 합니다” 이 당찬 자기 소개를 들은 당시 생도대장, 육사 21기 최승우 준장은 웃으면서 옆에 있는 대령에게 성적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또렷이 “괜찮습니다”라는 대답이 내 귀에 들렸다. 웃음꽃이 만발한 면접실의 좌장은 마지막까지 웃으면서 "그래 알았다“. 이 장면들은 지금까지 돌려보는 필자의 인생 드라마다.

최종 합격 발표전이라도 이미 합격했다는 확신을 했던지라 군의관과의 약속을 위해 더욱 체력 단련에 매진했다.

고향에 내려와 하청에서 행군 연습이랍시고 덕곡까지 걸어서 오가기를 몇 번씩 했고 역기를 어깨에 메고 옥상을 자주 오르락내리락 했다.

일간지에 최종 합격 발표 후 선친은 연초·하청·장목면 일대를 다니면서 전기배터리로 개천의 바위틈 사이에 있는 민물 장어를 잡아 아들의 몸보신을 걱정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 살아난다“는 기적을 체험한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 러시아 혁명에 참여해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던차에 사형 정지로 다시 살아나게 돼 불멸의 여러 명작을 남겼다.

우리 국군의 역사에도 기사회생의 대명사가 있다. 바로 박정희 소령이다. 여순사태란 1949년 10월 19일 여수와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가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좌익 세력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명 반란 사건이다.

남로당 군사책이었던 박정희 소령도 발각되고 투옥돼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백선엽 정보국장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다시 살아나게 됐다.

지금도 여러 자료에서 언급하는 사실은 사형을 앞둔 박 소령의 첫마디가 ”한번 살려 주십시오”라고 한다. 본인의 적극적인 삶의 의지와 작전술에 능한 실력과 만주군 인맥으로 소위 빽이 주효했다.

전역 후 우여곡절 끝에 문관(군무원)으로 군에 복귀하게 되고 6.25사변을 계기로 다시 육군 소령에 복직해 3년 만에 준장까지 진급하게 됐다.

도스토옙스키도 혁명 전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사형 면제 후 다시 병으로 복무해 부사관까지 진급 후 제대했다. 두 번 군대에 간 세계적인 가수 강남스타일의 싸이(Psy)도 빼놓을 수 없다.

육사에 입학 후 도서관에 가서 ”왜 화장실을 가는지 찾아보았다“ 신통치 않은 의학과 심리학 진단이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생도 생활을 통해 어느 정도 불편이 해소되고 익숙한 아침 일상이 됐다. 운 좋게도 2년 전 국가 건강검진에서 그 원인을 알게 됐다. 부러진 100의 인생이다 보니 복부 CT 촬영도 추가했다.

담당 의사가 이전에 수술한 적이 있냐고 계속 물어보았다. 당연히 그런 적이 없다고 해도 계속 모니터에 수술 자국이 있는데 하면서 필자를 어리둥절하고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MRI 촬영을 예약했다. 촬영 전까지 머릿속으로 ”아니 병원을 새로이 증축했다고 부당 진료를 하고 불필요한 수술을 권유한다는 소문이 설마 사실인가? “라는 의문을 품고 검사를 받았다.

검진 후 놀란 의사 曰 ”참 특이한 경우네, 췌장이 자라다 말았네…“

거제저널 gjnow3220@hanmail.net

<저작권자 © 거제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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